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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문헌 목록 〉16. 16世 〉5. <요재공>모헌공휘순필묘표(慕軒公諱舜弼墓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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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요재공>덕암공휘광국설단기(德庵公諱匡國設壇記)
<요재공후>덕암공휘광국설단기(德庵公諱匡國設壇記) 趙氏居玉川肇自麗時忠獻公諱元吉翰林諱九齡但為中世著祖至諱匡國字厚淑號德庵孝純而友尤篤嘗築小亭于金輪洞與伯仲二公寝食其中日與鄉人講習勸課時人稱之曰我鄉無德庵士林安倣而矜式公學文實行載邑誌可厚攷沒葬于豐山坊毛老亭外麓西原子孫遂瑣微失守每歲功既成慨澆奠無處思所寓慕己數世矣肆自其門之翹超澤龍聖太諸人胥倡于宗曰後之所以崇報功者惟歲祭庶可伸其萬一此不可但己也迺以己亥冬十月日干支占取所居羅州之老安坊案山築土為壇并夫人青松沈氏祭又將伐石而樹之壇聖太來徵余文夫墓失而壇近士族家義起之通規也况惟祖先之靈與子孫誠意相流通誠之如此神必洋洋而來格者失趙氏之為是也其得矣乎趙氏本簪纓古家流離中替惟急於報本綢繆拮克据克遂先父兄未遑之擧盖仁孝之風篤厚之意厥有所受來矣葛不休战呂不昌战 甲辰陽二月 瑞興金奎泰 撰書 덕암공(휘광국)설단기(德庵公諱匡國設壇記) 「조씨(趙氏)가 고려(高麗)때부터 순창에 사는데 충헌공(忠獻公)원길(元吉)과 한림공(翰林公)휘 구령(九齡)이 중세에 저명한 선조이고 휘 광국(匡國)에 이르러 자는 후숙(厚淑)이요 호는 덕암(德庵)인데 효도에 전일하고 우애에 더욱 더 탁월하여 일찍 작은 정자를 금륜동(金輪洞)에 세우고 백중 공으로 더불어 그 가운데서 자고 먹으며 날마다 고을 사람과 함께 강습하고 글읽기를 원하니 그때 사람이 우리 고을에 덕암(德庵)이 없으면 사림(士林)이 어디서 본받아 자랑할고 하였다. 공의 학문과 행의가 읍지(邑誌)에 실려 후일의 증거가 되었다. 별세하여 풍산방모로정외록유원(豐山坊毛老亭外麓酉原)에 장사하였더니 자손이 마침내 영락(零落)하여 실전하고 매양 추수가 이루워 지면 제물을 차려놓고 산소가 없음을 재단하여 추모부칠바를 생각한지가 이미 여러대 가 되었다. 고로 그 문중의 수재(秀才) 랙룡(澤龍)과 성대(聖太)등 여러 사람이 서로 종증에 주창하되 후손이 써 공을 갚을 바는 오직 세제(歲祭)로 그 萬에 1을 펴는 것이 라 하고 기해(己亥) 一九五九년 겨울 十월에 사는 곳 나주노안방안산(羅州老安坊案山) 에 땅을 사려 흙을 저서 단을 쌓고 부인 청송심씨(靑松沈氏)를 아울러 제사하며 또 장 차 돌을 깍아 단에 세우고 저 성태(聖太)가 와서 내게 기문을 청하였다. 무릇 묘소를 잃어버리고 단을 쌓은 것은 근래 사족사에서 일어난 규율이요 하물며 오직 선조의 정 령은 자손의 성의로 유명한 것이라 정성이 이와 같으면 신령이 반드시 넓고 크게 도와 서 감동(感通)할 것이니 조씨의 행사는 참으로 아름답고 착한일이로다. 조씨는 본래 규조세가(珪組世家)로 유리(流離)한중 침체가 되었으나 오직 근본에 보답하고 멀리 추모 한 정성에 치밀하고 근면하여 능히 선부형의 이루지 못한 일을 이루었음은 대개 인호 (仁孝)한 사탕과 독후(篤厚)한 뜻을 받아 온 바 있음이니 어찌 아름답지 아니하며 어 찌 창성하지 아니하겠는가. 서흥(瑞興) 김규태(金奎泰) 찬서(撰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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